마지막 궁중화가 김은호, 금차봉납도 초본 87년 만에 발견
마지막 궁중화가 이당 김은호의 친일 논란작 금차봉납도(1937) 초본이 87년 만에 유품 창고에서 발견됐다. 어진화가와 친일 부역 사이, 그의 두 얼굴을 되짚는다.
87년간 사라졌던 그림, 그 초본은 어떻게 세상에 나왔나?
마지막 궁중화가로 불린 이당 김은호(1892~1979)의 문제작 <금차봉납도>(1937)의 초본이 87년 만에 유품 창고에서 발견됐다. 원본의 행방이 확인되지 않은 채 오랜 세월 그의 친일 부역을 상징해 온 이 그림의 밑그림을, 아들 김성원씨가 2024년 2월 처음 확인했다. 거칠고 두터운 필치는 평소 이당의 매끄러운 선과 달라, 화가가 마지못해 붓을 들었던 정황을 새삼 되짚게 한다.

목차
김은호는 왜 '마지막 궁중화가'로 불렸을까?
김은호는 1912년 서화미술회에 들어가 안중식과 조석진의 문하에서 전통 회화를 익혔다. 같은 해 순종의 반신상 어용을 그렸고, 1928년에는 순종 어진을 완성해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했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진화가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다. 섬세한 세필 채색으로 미인도와 화조를 그려 근대 한국화의 한 봉우리를 세웠고,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붙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Kim Eun-ho painted the last royal portraits of the Joseon dynasty and even served jail time for distributing independence pamphlets in 1919.
금차봉납도는 어떤 그림이었나?
<금차봉납도>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조선 여성들이 금비녀와 금반지를 모아 일본군 군수자금으로 헌납하는 장면을 담은 기록화다. 그해 8월 20일 애국금차회 결성식에서 금비녀 11개와 금반지, 현금 889원 90전 등이 즉석에서 모였고, 이 광경이 대형 화폭에 옮겨졌다. 회장은 윤덕영의 부인 김복완이었고 김활란 등이 간사로 참여했다. 총독부는 이 그림을 엽서로 찍어 조선·대만·일본에 배포하며 전시 총동원 체제의 선전물로 활용했다.
The painting depicted Korean women donating gold hairpins to fund the Japanese army, and the colonial government turned it into propaganda postcards.
발견된 초본은 무엇을 말해 주나?
새로 확인된 초본은 두꺼운 한지에 둘둘 말린 채 <신선도> 같은 다른 대작 초본들과 함께 보관돼 있었다. 겉을 감싼 종이에는 '기록화'라고만 적혀 있었다. 아들 김성원씨는 "아버지가 이것 때문에 그렇게 매도당하셨는데 여기 있구나 싶었다"고 회고했다. 필치가 평소와 확연히 달라 "아버지가 그린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는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일본 놈들이 그리라는 걸 그렸고, 도망갔다 잡혀 와 하는 수 없이 그렸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원본이 아닌 이 초본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The rediscovered sketch, labeled simply "documentary painting," shows unusually rough brushwork that his son says hints at reluctance behind its creation.
친일과 예술, 그 평가는 어디로 향하나?
김은호는 <금차봉납도> 외에도 1937년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 1942년부터 반도총후미술전 심사위원을 맡아 친일 행적을 남겼다. 이 그림은 조선인 화가들이 친일 작품을 생산하는 물꼬를 튼 사례로 꼽히며, 그는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반면 광복 후에는 1962년 문화훈장, 1965년 3·1문화상, 1968년 예술원상을 받으며 화단의 원로로 대접받았다. 초본의 재발견은 어진화가와 친일 부역이라는 두 얼굴을 어떻게 함께 기억할 것인가라는 오래된 물음을 다시 불러낸다.
The sketch's return reignites the long debate over how to remember an artist who was both the last royal court painter and a documented collaborator.
초본 한 장은 왜 87년의 침묵을 다시 깨우는가?
이번 초본의 발견이 던지는 무게는 단순히 '잃어버린 유물이 돌아왔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원본이 사라진 자리에서 밑그림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김은호를 둘러싼 논쟁이 여전히 결말에 이르지 못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금차봉납도>는 오랫동안 그의 이름 앞에 붙는 가장 무거운 낙인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그림의 실체는 완성작이 아니라, 완성으로 향하던 과정의 흔적으로 우리 앞에 돌아왔다. 낙인과 실물 사이의 이 어긋남이야말로 이 발견의 핵심이다.
주목할 대목은 아들 김성원씨가 전한 필치의 이질감이다. 평소 이당의 선은 매끄럽고 가지런했다는데, 이 초본만은 거칠고 두텁다. 물론 한 사람의 회고와 붓질의 인상만으로 화가의 내면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록화라는 장르가 본래 정교한 재현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떠올리면, 유독 이 그림에서만 손이 흔들렸다는 정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강요와 자발, 생계와 신념 사이 어디쯤에 화가가 서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김은호의 생애가 유독 까다로운 것은 그가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기 때문이다. 1919년 독립신문을 돌리다 옥고를 치른 청년과, 1937년 총동원 체제의 선전화에 붓을 댄 중년이 같은 사람이다. 광복 후 문화훈장과 예술원상을 받은 원로화가와,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부역자 역시 같은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 역사 속 인물을 영웅과 반역자라는 두 칸 서랍에 나눠 넣고 싶어 하지만, 김은호는 그 어느 서랍에도 온전히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초본의 거친 필치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마지못해 그렸다는 정황이 사실이라 해도, 그 그림이 총독부의 엽서가 되어 조선과 대만, 일본으로 퍼지며 수많은 여성의 금비녀를 전쟁 자금으로 끌어낸 결과까지 지워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판결을 뒤집는 일이 아니라, 판결의 근거가 되는 사실의 결을 더 촘촘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 초본은 김은호를 용서하기 위한 자료가 아니라, 그를 더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한 자료로 다뤄져야 한다. 한 예술가의 재능과 과오를 분리하지 않고 함께 응시하는 일, 그 불편함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식민의 기억을 대하는 성숙한 태도일 것이다.
The rediscovered sketch is not a pardon but a document that forces us to remember Kim Eun-ho more precisely—holding his talent and his collaboration in the same gaze.
자주 묻는 질문
Q. 금차봉납도의 원본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원본의 행방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것은 원본이 아니라 밑그림에 해당하는 초본으로, 그 존재가 처음으로 확인됐습니다.Q. 애국금차회는 어떤 단체였나요?
1937년 8월 결성된 친일 여성단체로, 귀족·관료 부인들이 주축이 되어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 원호를 명목으로 금비녀 헌납 운동을 벌였습니다.Q. 김은호는 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나요?
금차봉납도 제작과 조선미술가협회 평의원, 반도총후미술전 심사위원 등 전시 체제에 협력한 행적이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돼 2009년 사전에 수록됐습니다.Q. 김은호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도 사실인가요?
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기록이 있어, 그의 생애는 친일과 항일이 교차하는 복합적 궤적으로 평가됩니다.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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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Sources
- 김은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NewsArticle)
- 조선 최후 어진 화가 김은호, 그의 친일을 만나다 - 오마이뉴스(NewsArticle)
- 친일인명사전 - 민족문제연구소(NewsArticle)
- 김은호 - 위키백과(News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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